Exhib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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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GEE ARTIST #40 김준
성스러운 지층
2026.05.29. FRI ~
2026.07.18. SAT
<나에게 자라나는 소리>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김준은 소리를 채집할 지역을 선택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예민하게 소리를 귀로 듣고, 그 장소에서 눈으로 관찰한 것을 사운드스케이프로 전시장에 구현한다. 그의 관심은 개인이 머무는 도시의 주변 환경에서부터 전 지구적인 생태계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 제목인 《성스러운 지층》에서 지층은 그가 이전부터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화산 활동 지대의 암석과 같은 지질학적 요소들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성스러운’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다녀온 지역과 그가 채집한 소리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롬복 지역을 방문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작가가 관심이 있는 환태평양 조산대와 월리스 라인이 교차하는 화산 지대이다. 그는 활화산의 진동과 같이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을 울리는 태초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이 장소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원래 계획했던 이 지역에서 채집하려는 소리보다는 점점 더 지역적 특색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물리적 진동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성한 종교적 소리가 혼재된 상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섬으로 이동했을 때, 종교가 다르므로 온전히 다른 소리가 들리면서 공간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작업 배경에 관해 언급하지 않....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김준은 소리를 채집할 지역을 선택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예민하게 소리를 귀로 듣고, 그 장소에서 눈으로 관찰한 것을 사운드스케이프로 전시장에 구현한다. 그의 관심은 개인이 머무는 도시의 주변 환경에서부터 전 지구적인 생태계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 제목인 《성스러운 지층》에서 지층은 그가 이전부터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화산 활동 지대의 암석과 같은 지질학적 요소들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성스러운’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다녀온 지역과 그가 채집한 소리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롬복 지역을 방문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작가가 관심이 있는 환태평양 조산대와 월리스 라인이 교차하는 화산 지대이다. 그는 활화산의 진동과 같이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을 울리는 태초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이 장소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원래 계획했던 이 지역에서 채집하려는 소리보다는 점점 더 지역적 특색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물리적 진동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성한 종교적 소리가 혼재된 상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섬으로 이동했을 때, 종교가 다르므로 온전히 다른 소리가 들리면서 공간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작업 배경에 관해 언급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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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자라나는 소리>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김준은 소리를 채집할 지역을 선택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예민하게 소리를 귀로 듣고, 그 장소에서 눈으로 관찰한 것을 사운드스케이프로 전시장에 구현한다. 그의 관심은 개인이 머무는 도시의 주변 환경에서부터 전 지구적인 생태계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 제목인 《성스러운 지층》에서 지층은 그가 이전부터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화산 활동 지대의 암석과 같은 지질학적 요소들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성스러운’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다녀온 지역과 그가 채집한 소리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롬복 지역을 방문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작가가 관심이 있는 환태평양 조산대와 월리스 라인이 교차하는 화산 지대이다. 그는 활화산의 진동과 같이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을 울리는 태초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이 장소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원래 계획했던 이 지역에서 채집하려는 소리보다는 점점 더 지역적 특색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물리적 진동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성한 종교적 소리가 혼재된 상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섬으로 이동했을 때, 종교가 다르므로 온전히 다른 소리가 들리면서 공간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작업 배경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는 동시에 반발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종교는 종교적 공간에서 기도와 같은 의례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생활 방식과 밀접하게 이어져 삶에 영향을 끼쳐왔다. 요즘의 종교는 실제의 생활에서 어느 정도 분리된 것이 사실이지만, 작가가 방문한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자연과 종교와 이어진 인간의 삶이 하나로 엉켜서 분리할 수 없는 환경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는 원래의 계획과 다르게 그 장소와 소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이 가진 내밀한 소리보다는 그가 방문한 지역이 표면적으로 발산하는 여러 소리를 자연스럽게 채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가 채집한 소리에는 새벽에 빛과 함께 깨어나는 자연의 벌레 소리가 들리다가, 그 소리에 이어 겹쳐서 들리게 되는 종교의식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에 갑자기 내리는 빗소리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소리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게 들려서 그 소리를 채집한 것일까? 아마도 서로 다른 소리가 공존하는 순간이 하나의 우주처럼 한 덩어리로 느껴지는, 다시 말해 합일의 찰나를 드러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가 채집한 소리는 무엇을 위해 다듬어지지 않은 것, 어찌 보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꾸며내지 않은 생생한 날 것 같은 소리의 접촉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저 그 시간을 채웠던 소리가 온전히 작가의 귀로 고스란히 들어와 생성된 감각적 전이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작가가 찾아낸 태초의 소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저 깊은 곳에 있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소리이다. 이제는 작가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의도하는 것을 따라가 보자. 그는 이전 작업에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것이 인간의 청력으로는 보통 듣지 못하는 자연의 진동과 같은 은밀한 내부의 소리를 끌어내어 듣게 되었을 때 비로소 펼쳐지는 감각의 확장을 의도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의 감각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만을 채집하였다. 먼저 그의 작업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그가 생생하게 담아내는 소리는 전시장으로 옮겨져서 사운드스케이프의 방식으로 설치된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읽고 있는 이 글과 더불어 작가에 의해 제공되는 여러 단서를 바탕으로 특정한 소리를 듣게 되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소리인지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작가가 현장에서 소리를 녹음할 때 촬영한 구체적인 이미지나 채집된 오브제를 전시장 안에서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특정한 소리를 통해 쉽게 어떤 장면을 연상하면서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그 현장에서 경험한 소리에 담긴 무의식적 내면과 의식적 현실, 특별한 행위와 일상적인 움직임,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과 같이 그곳에서 존재했던 것들과 공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지도 모른다. 이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에서 벗어나 최대한 그가 머물렀던 바로 그 시공간의 감각을 조화롭게 채우고 자극했던 소리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그것을 기계장치에 담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도 온전히 담아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계에 담긴 소리보다는 자신에게 들어온 소리 그 자체이다. 하늘과 땅, 새와 식물, 제단과 꽃, 비와 바람, 낮과 밤, 산과 바다, 힌두교,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와 하나의 시간과 장소에 서로 만나 겹치는 장면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소리가 결합한 현상이다. 이렇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이 내밀한 관계로 맺어지게 되는 그 순간에 그곳을 채웠던 소리의 생생한 감각을 전시장에서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는 전시장에서 초지향성 스피커와 여러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는 소리가 그가 느낀 감각을 온전하지 않은 간접적인 경험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글이 작가가 채집한 소리를 들어 보았음에도 작가의 경험에 기대어 온전하지 않은 사변적인 글의 형식을 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여하튼 작가가 들려주는 소리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그곳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니 좀 더 그의 의도를 따라가 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준은 전시장에서 자신이 채집한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소리만으로 온전히 듣고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이전 전시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도 알고 있듯이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는 동시에 많은 것을 통제한다. 그리고 요즘은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번 전시의 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전시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 보지 말고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될까? 눈을 감아보면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일 뿐이고, 이는 관념들의 한 단면이어서 언제든 가까스로 떠올리거나 끊임없이 흐트러지곤 하는 규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작가는 상상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지를 배제하였다. 전시장은 두 장소로 나뉜다. 커튼으로 구획된 곳은 자리에 앉기도 하고, 공간을 이동하기도 하면서 소리를 듣게 된다. 다른 장소는 온전히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그곳에 누워서 정주한 상태로 소리를 듣는다. 그 사이의 유리벽과 문에는 문자, 기호, 문양들로 가득 차 있다. 처음의 장소에서 관객이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들리는 소리가 달라지면서 조합되는 개별적 경험을 한다면, 혼자 듣게 될 때는 온전히 하나로 연결된 소리를 들으며 느끼게 될 것이다. 전자가 움직임과 멈춤을 통해 더듬고 뒤적거리는 동적인 행위에 기반한 우연을 의도한다면, 후자는 한 장소에 머물며 소리가 전달하는 소리와 진동을 하나의 울림으로 인식하여 시각, 후각, 촉각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는 정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작가가 두 전시장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불완전한 현실에서 충만함의 시공간으로 전이되었다가 다시 불완전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이전의 작업이 나의 외부에 분명히 존재하는 진동과 나를 공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성스러운 지층》은 외부의 것이 나의 내부에 잠자고 있던 파동을 깨우는 일이라 볼 수 있겠다. 이것은 언어와 이미지로 설명되지 않는 것, 마치 질서가 있던 것들이 무질서의 생명력으로 가득 찬 그들만의 법칙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혼재된 풍경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두 공간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여러 소리가 지나가는 것을 듣는다. 이 소리를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것들로 구분하여 듣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인가 부딪쳐서 나는 공기층의 마찰음과 같이 미세하게 진동하거나 울리는 소리와 같은 추상적인 감각과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이는 일시적으로 자극하는 소리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통해 집중하거나 충분히 젖어 들 때에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가 전시장에서 듣고 있는 표면적인 바람 소리, 종소리, 빗소리, 새소리, 예배소리 같이 그 소리가 가진 상징과 의미를 제거한 소리에 깊이 빠져들어 가는 명상의 단계에 다다르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전시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작가와 공유되는 추상적 감각이며, 작가와 간접적인 접촉만이 일어날 뿐이어서 관객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듣는 사람으로 혼자만의 시공간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성스러운 지층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이성적 사유와 성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소리에 집중하여 수직적으로 깊게 파고들면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열리는 새로운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리해 보자면, 김준이 이번 전시에서 이야기하는 성스러움은 종교적인 엄숙함이나 자연이 주는 숭고와 같은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소리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일상적인 소리의 성스러움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건드리고 다듬지 않은 원석과 같은 소리 다시 말해 이미지화되어 있지 않은 태초의 소리를 깊게 탐색하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가 이번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성스러움은 그것을 듣는 자가 들리는 소리에 깊이 물들어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제시된다. 이는 마음을 하나에 지점에 집중하여 내면으로 침잠하는 명상의 상태와 유사하다. 이 명상적 태도는 처음 낯선 소리를 듣는 어색한 그 시간을 지나 온전히 소리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지는 ‘나’만의 듣기에 다다르도록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와 공명하는 순간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는 성스러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스러운 지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이며, 여기에서 들리는 것은 지구의 생태계와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될 끝나지 않을 시공간을 채우는 모든 소리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 소리를 듣는 각자의 내면에 새로운 울림으로 스며들게 되길 바란다. 그러니 그가 채집한 소리는 시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일반적인 사운드스케이프이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머물며 계속해서 ‘자라나는 소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다가 언젠가는 세상 밖에 다시 울려 퍼지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그 울림이 궁금해진다.
신승오(페리지갤러리 디렉터)
김준은 소리를 채집할 지역을 선택하고 그곳에 머물면서 예민하게 소리를 귀로 듣고, 그 장소에서 눈으로 관찰한 것을 사운드스케이프로 전시장에 구현한다. 그의 관심은 개인이 머무는 도시의 주변 환경에서부터 전 지구적인 생태계까지 이어진다. 이번 전시 제목인 《성스러운 지층》에서 지층은 그가 이전부터 작업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화산 활동 지대의 암석과 같은 지질학적 요소들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면 ‘성스러운’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먼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다녀온 지역과 그가 채집한 소리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인도네시아의 발리와 롬복 지역을 방문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작가가 관심이 있는 환태평양 조산대와 월리스 라인이 교차하는 화산 지대이다. 그는 활화산의 진동과 같이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환경을 울리는 태초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이 장소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해보니 원래 계획했던 이 지역에서 채집하려는 소리보다는 점점 더 지역적 특색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물리적 진동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신성한 종교적 소리가 혼재된 상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섬으로 이동했을 때, 종교가 다르므로 온전히 다른 소리가 들리면서 공간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작업 배경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는 동시에 반발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종교는 종교적 공간에서 기도와 같은 의례적 행위를 통해 인간의 생활 방식과 밀접하게 이어져 삶에 영향을 끼쳐왔다. 요즘의 종교는 실제의 생활에서 어느 정도 분리된 것이 사실이지만, 작가가 방문한 이 지역에서는 여전히 자연과 종교와 이어진 인간의 삶이 하나로 엉켜서 분리할 수 없는 환경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는 원래의 계획과 다르게 그 장소와 소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상황에서 자연이 가진 내밀한 소리보다는 그가 방문한 지역이 표면적으로 발산하는 여러 소리를 자연스럽게 채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가 채집한 소리에는 새벽에 빛과 함께 깨어나는 자연의 벌레 소리가 들리다가, 그 소리에 이어 겹쳐서 들리게 되는 종교의식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에 갑자기 내리는 빗소리처럼 너무나 일상적인 소리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게 들려서 그 소리를 채집한 것일까? 아마도 서로 다른 소리가 공존하는 순간이 하나의 우주처럼 한 덩어리로 느껴지는, 다시 말해 합일의 찰나를 드러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가 채집한 소리는 무엇을 위해 다듬어지지 않은 것, 어찌 보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꾸며내지 않은 생생한 날 것 같은 소리의 접촉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저 그 시간을 채웠던 소리가 온전히 작가의 귀로 고스란히 들어와 생성된 감각적 전이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작가가 찾아낸 태초의 소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저 깊은 곳에 있는 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소리이다. 이제는 작가가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의도하는 것을 따라가 보자. 그는 이전 작업에서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는 것이 인간의 청력으로는 보통 듣지 못하는 자연의 진동과 같은 은밀한 내부의 소리를 끌어내어 듣게 되었을 때 비로소 펼쳐지는 감각의 확장을 의도했었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는 인간의 감각으로 들을 수 있는 소리만을 채집하였다. 먼저 그의 작업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그가 생생하게 담아내는 소리는 전시장으로 옮겨져서 사운드스케이프의 방식으로 설치된다. 아마도 우리는 지금 읽고 있는 이 글과 더불어 작가에 의해 제공되는 여러 단서를 바탕으로 특정한 소리를 듣게 되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떤 소리인지 파악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명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작가가 현장에서 소리를 녹음할 때 촬영한 구체적인 이미지나 채집된 오브제를 전시장 안에서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특정한 소리를 통해 쉽게 어떤 장면을 연상하면서 떠올려 볼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그 현장에서 경험한 소리에 담긴 무의식적 내면과 의식적 현실, 특별한 행위와 일상적인 움직임,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들과 같이 그곳에서 존재했던 것들과 공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지도 모른다. 이처럼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미지에서 벗어나 최대한 그가 머물렀던 바로 그 시공간의 감각을 조화롭게 채우고 자극했던 소리에 집중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그것을 기계장치에 담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을 자신의 내부에도 온전히 담아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계에 담긴 소리보다는 자신에게 들어온 소리 그 자체이다. 하늘과 땅, 새와 식물, 제단과 꽃, 비와 바람, 낮과 밤, 산과 바다, 힌두교, 이슬람교와 같은 종교와 하나의 시간과 장소에 서로 만나 겹치는 장면은 복잡하고 다층적인 소리가 결합한 현상이다. 이렇게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것이 내밀한 관계로 맺어지게 되는 그 순간에 그곳을 채웠던 소리의 생생한 감각을 전시장에서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는 전시장에서 초지향성 스피커와 여러 스피커를 통해 들려주는 소리가 그가 느낀 감각을 온전하지 않은 간접적인 경험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글이 작가가 채집한 소리를 들어 보았음에도 작가의 경험에 기대어 온전하지 않은 사변적인 글의 형식을 취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
여하튼 작가가 들려주는 소리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그곳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니 좀 더 그의 의도를 따라가 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김준은 전시장에서 자신이 채집한 소리를 듣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 소리만으로 온전히 듣고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이전 전시와는 다르게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드러내어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도 알고 있듯이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는 동시에 많은 것을 통제한다. 그리고 요즘은 모든 것이 이미지화되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이번 전시의 소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전시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 보지 말고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될까? 눈을 감아보면 그제야 보이는 것이 있다. 물론 이것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일 뿐이고, 이는 관념들의 한 단면이어서 언제든 가까스로 떠올리거나 끊임없이 흐트러지곤 하는 규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작가는 상상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이미지를 배제하였다. 전시장은 두 장소로 나뉜다. 커튼으로 구획된 곳은 자리에 앉기도 하고, 공간을 이동하기도 하면서 소리를 듣게 된다. 다른 장소는 온전히 혼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그곳에 누워서 정주한 상태로 소리를 듣는다. 그 사이의 유리벽과 문에는 문자, 기호, 문양들로 가득 차 있다. 처음의 장소에서 관객이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들리는 소리가 달라지면서 조합되는 개별적 경험을 한다면, 혼자 듣게 될 때는 온전히 하나로 연결된 소리를 들으며 느끼게 될 것이다. 전자가 움직임과 멈춤을 통해 더듬고 뒤적거리는 동적인 행위에 기반한 우연을 의도한다면, 후자는 한 장소에 머물며 소리가 전달하는 소리와 진동을 하나의 울림으로 인식하여 시각, 후각, 촉각을 통해 온몸으로 느끼는 정적인 행위를 적극적으로 유도한다. 작가가 두 전시장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일종의 불완전한 현실에서 충만함의 시공간으로 전이되었다가 다시 불완전함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이전의 작업이 나의 외부에 분명히 존재하는 진동과 나를 공명하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성스러운 지층》은 외부의 것이 나의 내부에 잠자고 있던 파동을 깨우는 일이라 볼 수 있겠다. 이것은 언어와 이미지로 설명되지 않는 것, 마치 질서가 있던 것들이 무질서의 생명력으로 가득 찬 그들만의 법칙으로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혼재된 풍경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두 공간에서 작가가 들려주는 여러 소리가 지나가는 것을 듣는다. 이 소리를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것들로 구분하여 듣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무엇인가 부딪쳐서 나는 공기층의 마찰음과 같이 미세하게 진동하거나 울리는 소리와 같은 추상적인 감각과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이는 일시적으로 자극하는 소리가 아니라 일정한 시간을 통해 집중하거나 충분히 젖어 들 때에 가능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작가는 우리가 전시장에서 듣고 있는 표면적인 바람 소리, 종소리, 빗소리, 새소리, 예배소리 같이 그 소리가 가진 상징과 의미를 제거한 소리에 깊이 빠져들어 가는 명상의 단계에 다다르길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전시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작가와 공유되는 추상적 감각이며, 작가와 간접적인 접촉만이 일어날 뿐이어서 관객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듣는 사람으로 혼자만의 시공간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작가가 이야기하는 성스러운 지층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이성적 사유와 성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소리에 집중하여 수직적으로 깊게 파고들면서 느껴지는 감각으로 열리는 새로운 시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리해 보자면, 김준이 이번 전시에서 이야기하는 성스러움은 종교적인 엄숙함이나 자연이 주는 숭고와 같은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소리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일상적인 소리의 성스러움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건드리고 다듬지 않은 원석과 같은 소리 다시 말해 이미지화되어 있지 않은 태초의 소리를 깊게 탐색하면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가 이번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성스러움은 그것을 듣는 자가 들리는 소리에 깊이 물들어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제시된다. 이는 마음을 하나에 지점에 집중하여 내면으로 침잠하는 명상의 상태와 유사하다. 이 명상적 태도는 처음 낯선 소리를 듣는 어색한 그 시간을 지나 온전히 소리에 대한 감각으로 채워지는 ‘나’만의 듣기에 다다르도록 이끌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와 공명하는 순간 우리는 작가가 의도하는 성스러움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국 《성스러운 지층》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이며, 여기에서 들리는 것은 지구의 생태계와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지속될 끝나지 않을 시공간을 채우는 모든 소리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 소리를 듣는 각자의 내면에 새로운 울림으로 스며들게 되길 바란다. 그러니 그가 채집한 소리는 시공간을 상상하게 하는 일반적인 사운드스케이프이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머물며 계속해서 ‘자라나는 소리’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나’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다가 언젠가는 세상 밖에 다시 울려 퍼지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그 울림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