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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GEE GALLERY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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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현실·가상 공존 '회화적 실험'…페리지갤러리의 28번째 결실
2022-06-16
[예술, K메디치를 만나다]
㈜KH바텍 페리지갤러리
정교한 묘사력의 장재록 개인전
실제-게임속 풍경 수묵으로 표현
40대 작가 지원 페리지갤러리
2년 준비기간·1000만원 지원
8년간 뚝심있게 개인전만 열어


KH바텍의 비영리 전시장 페리지갤러리에서 7월 30일까지 열리는 장재록 개인전 전경. 수묵으로 그린 픽셀 풍경화로, 하나는 실제 자연, 하나는 게임 속 장면애 기반했다. /사진제공=페리지갤러리

[서울경제]

두 점의 수묵화가 있다. 하나는 자연 풍경이고, 나머지 한 점은 게임 속 풍경이다. 구별해낼 수 있겠는가. 한국화가 장재록(44)의 ‘또 다른 행위(Another Act)’ 연작이다. 1㎝ 정도의 작은 격자로 화면을 잘게 나눈 다음, 먹(墨)으로 한 칸을 다 채우거나 아예 칠하지 않는 방식으로 작업한 일종의 ‘픽셀화’다. 직접 다녀온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 오른쪽 작품이다. 왼쪽은 작가가 최근 빠져든, 미국 서부개척 시대를 재현한 오픈월드 게임인 ‘레드 데드 리뎀션2’에서 캡처한 풍경이다.

장재록의 개인전 ‘더 스퀘어(The Squre)’가 서초구 반포대로 페리지갤러리에서 7월 30일까지 열린다. 수묵의 농담(濃淡)만으로 사진처럼 생생하게 자동차를 그려내 ‘폭스바겐’ 광고에도 참여했던 작가다. 일찍이 스타작가로 이름을 알리며 외국의 도시 풍경, 화려한 샹들리에 등을 그리던 그가 돌연 묘사력을 버렸다. 2017년 무렵의 일이다.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한창인 장재록의 개인전 '더 스퀘어' 전경. /조상인 기자


“옛 화가들과 같은 재료를 사용하나 현대를 살아가는 내가 그려야 할 ‘이 시대의 풍경’은 뭘까를 고민하다 시대를 대표하는 자본주의와 기술력의 상징이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자동차’를 택했습니다. 풍경도 자동차에 비친 모습으로 그렸죠. 문득, 생생하게 드러낸 이미지를 놓고 ‘자동차이고, 뉴욕이니 보라’는 식으로 강요하는 게 폭력적으로 느껴졌어요.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멈추고 새로운 리얼리티를 찾아보자 결심했습니다.”

의외로 답은 자기 안에 있다. 토목설계 공학자인 아버지 책상 위의 모눈종이에, 서예가인 어머니의 붓으로 먹그림을 그리던 어릴적 기억과 그 편안함이 새삼 떠올랐다. 예술가의 자유로움과 기계의 작동원리를 접목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새로운 회화의 평면성”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보다 극적인 풍경을 찾으려 외국 스케치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혔다. 작가는 “3D 지도어플로 낯선 풍경을 찾아다녔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게임에서 캡쳐한 ‘비현실의 풍경’이었다”면서 “실제 자연보다 더 자연스러운 가상의 현실이 그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장재록의 신작 '또다른 행위'는 전통한지와 먹으로 그린 수묵화지만 뒷면에 RGB컬러의 원색을 배접해 현실과 가상이 앞뒷면처럼 맞닿아있음을 강조해 보여준다. /조상인기자


한지 위 격자에 스케치를 하고 중묵(中墨)으로 형상을 그린 다음 한 칸에서 그려진 부분의 비중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짙은 먹으로 채우고, 그렇지 않으면 칠하지 않았다. 흑백과 유무의 이분법적 논리는 0과 1로만 이뤄진 디지털 세계의 이진법 언어와도 맞아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전통 장인이 수공으로 만든 먹과 한지를 사용했고, 칠하지 않았으나 비워진(空) 것도 아닌 ‘여백의 미’와 덧칠한 먹 자국의 ‘손맛’도 느낄 수 있다. 매끈한 기계의 논리와 텁텁한 인간의 흔적이 공존하는 작품이 됐다.


장재록의 신작 '또다른 행위'가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전시 중이다. /조상인기자


장 작가가 새 작업을 모색하며 긴 시간 집중할 수 있었던 배경에 페리지갤러리가 있다. 휴대전화와 노트북 내외장재 제조사인 ㈜KH바텍(060720)이 2014년에 개관한 비영리 전시공간이다. 남광희 회장의 부인이자 당시 CSR본부장이던 김종숙 경영지원총괄사장이 “신진작가와 중견 이상으로 양분화돼 설 자리가 부족한 40대 작가를 위한 예술공간”을 목표로 개관을 주도했고, “예술을 통해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고자” 가까운 지점을 뜻하는 ‘페리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진으로 도약해야 할 40대 미술가들은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이 많은 20~30대와 안정적 중견작가가 된 50~60대의 사이의 ‘낀 세대’지만 새로운 모색이 절실한 ‘한국미술의 허리’이기 때문이다. 페리지는 신승오 디렉터에게 작가 발굴과 전시 기획의 독립성을 일임했다. 2년간의 준비 기간과 1000만원 이상의 전시지원금을 제공해 작가들에게 전환점을 제공하기에, 이곳에서 전시한 작가 중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작가’에 선정되거나 미술상을 수상한 사례가 유독 많다. 뚝심있게 개인전만 열었고 이번 장재록의 전시는 그 28번째 결실이다.



출처: 서울경제 (https://www.sedaily.com/NewsView/2678S2QLU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