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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공감하는 척 말라…그저 귀 기울여라
2019-03-29
정연두 영상작품 `고전과 신작`

"도쿄 공습 겪은 노인과
초등학생들 이야기서
당신만의 메시지 찾길"


△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작가의 영상 작품 `고전과 신작`.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서울 서초동 페리지갤러리 전시장에 설치된 대형 화면 3개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영상이 43분42초 동안 흘러나왔다.

첫 번째 화면에서는 일본 도쿄 문방구 주인 와케베 도시히로(81)의 눈이 전쟁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1945년 3월 10일 미군의 도쿄 대공습이 있던 날, 그는 고토(江東) 구청 안에 숨어 있었다. 밖에서는 미군 전투기가 투하한 소이탄이 모든 것을 태우고 있었다.
와케베는 "그때 밖에서 `쿵! 쿵! 쿵!` `문 열어줘` 한참을 두드렸어. 하지만 안에 있던 어른들은 열지 않았지. 그 대신 불이 잦아들어 밖에 나갔을 때는 이미 새카맣게 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어"라고 독백을 이어간다. 두 번째 화면에서는 일본 전통 예술인 라쿠고(落語) 명인 산유테이 우타지(71)가 만담을 펼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자주 그림책을 읽어주셨다던가, 그림책도 여러 가지가 있지요…."

세 번째 화면에서는 도쿄 기요스미 시라카와 지역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해맑은 얼굴로 발표를 이어가고 있다. 열 살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즐거웠던 일`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후 자기 이야기를 들려줬다.

"4학년 1반 스기로 쇼지로입니다. 이 그림은 아직 다 그리지 않았지만, 우리 할아버지와 건널목에 가서 전동차를 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아마 이때가 네 살 정도인데, 지금은 할아버지가 안 계십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 성균관대 교수(50) 영상 작품 `고전과 신작`은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3개 화면에서 묘한 교차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열 살 때 기억을 들려주고, 아이들은 할아버지에 대해 말한다. 벌레와 술 등 화제가 겹치기도 한다. 작가는 4일 동안 도쿄 초등학교 학생 120명을 인터뷰해 편집의 묘를 발휘했다.

노인의 유년 시절을 공습한 전쟁은 오늘을 사는 어린이의 삶을 덮칠 수도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난해 일본 도쿄 현대미술관 요청으로 이 작품을 제작한 작가는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누구나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 이야기다. 관객들이 의미를 찾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어설프게 공감할 필요도 없다. 작가 역시 "공감에는 많은 모순과 위험이 있다. 2014년 후쿠시마 원전에서 100㎞ 떨어진 아트 타워 미토 미술관 개인전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려 했는데 `너는 여기 안 살잖아`라고 하니까 할 말이 없더라. 그래서 희망을 전달하기보다는 옆으로 물러나 관람객과 지역민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전시를 만들었다. 그 후 공감하는 척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색안경을 끼고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저 귀를 기울여 인터뷰 대상들의 이야기를 경청한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도쿄 현대미술관 큐레이터가 그의 영상 작품 `높은 굽을 신은 소녀`를 보고 제안했다고 한다. 1958년 23세 때 홍콩에 밀입국한 할머니와 2017년을 살아가는 23세 키 작은 소녀들의 인터뷰 영상 작품으로 키가 작다는 것 외에는 등장인물들의 공통점은 없다.

그는 2007년 38세 최연소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으며 현실과 비현실, 이상과 현실을 대비시켜 꿈을 다뤄왔다. 이번 전시는 중견기업 KH바텍이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공간 페리지갤러리가 40대 이상 작가를 소개하는 `페리지 아티스트` 18번째 행사다. 전시는 5월 11일까지.

전지현 기자
2019.03.28.
(기사 원문 :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9/03/189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