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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정연두 "공감하는 '척'에 얼마나 많은 위험과 모순이"
2019-03-22
日도쿄도현대미술관 의뢰 영상, 서초동 페리지갤러리 '지금, 여기'展 공개
전쟁 기억·어린이·전통 공연 교차…"함께 보며 길의 의미 스스로 찾자"

정연두, 고전과 신작, 3채널 비디오, 43분42초, 2018
정연두, 고전과 신작, 3채널 비디오, 43분42초, 2018[연합뉴스 자료사진]

상기된 표정의 아이들이 북을 두드린다. 쿵쿵쿵. 북소리는 맞은편 화면 속 노인의 옛 기억을 불러낸다. "내가 들어온 뒤 바로 문이 닫혔지."

미군 도쿄 대공습이 있었던 1945년 3월 10일. 고토(江東) 구청 안으로 미처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절박하게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내부로 피신한 사람들은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 "(공습이 끝나고 문을 열자) 이미 새카맣게 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어." 열살 소년은 여든넷 노인이 됐지만, 어떠한 선택이 옳았는지는 여전히 답하기 어렵다.

관객도 함께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다른 스크린에서는 일본의 전통 예술인 라쿠고(落語) 명인이 신명 나게 만담을 시작한다. "사람들은 어릴 적 말이죠……."

지난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페리지갤러리에서 개막한 정연두 개인전의 중심 작업 '고전과 신작'이다.

정연두(50)는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를 통해 꿈을 파고드는 작업으로 일찌감치 주목받은 미디어 아티스트다.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연소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 중인 정연두는 요즘 무관해 보이는 여러 이야기를 하나로 엮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이번 '고전과 신작'도 홍콩을 배경으로 한 '높은 굽을 신은 소녀'(2018)를 본 도쿄도현대미술관 의뢰로 제작됐다.


정연두, 고전과 신작, 3채널 비디오, 43분42초, 2018
정연두, 고전과 신작, 3채널 비디오, 43분42초, 2018[작가·페리지갤러리 제공]

43분 42초 길이의 '고전과 신작'은 처음에는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어릴 적 전쟁을 경험한 노인 독백과 초등학교 4학년 수업 장면, 라쿠고 명인의 공연이 3개 스크린을 쉼 없이 오간다. 작가가 도쿄의 유서 깊은 기요스미 시라카와(淸澄白河) 지역 주민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며 촬영한 영상들이다.

"서로 전혀 모르는 3명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다"라는 작가 설명처럼 각 스크린이 송출하는 이야기는 무관하다. 그러한 세 화면이 어느 지점에서 이어졌다가 어긋나기를 반복하는 데 작품 묘미가 있다.

아이들이 교실에서 비눗방울을 날리는 모습은 피난처에서 반딧불을 잡으러 다닌 노인의 회고와 겹친다. '아버지와 술'을 주제로 한 라쿠고는 술꾼 조부를 소개하는 아이의 발표와 이어진다. 전쟁 공포에 떨었던 과거 어린이 이야기는 구김살 하나 없는 지금 아이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지난 14일 전시장에서 만난 정연두는 "무엇을 어떻게 봐줬으면 좋겠다거나, 희망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은 없다"라고 말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공감의 문제에요. 다른 지역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공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 공감하는 '척' 하는 것에 많은 모순과 위험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어떻게 희망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말로는 쉽지'가 되기 쉽거든요."


정연두 작가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가 14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페리지갤러리 개인전 '지금, 여기' 현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삼성미술관 플라토 이후 5년 만의 국내 개인전이다.

정연두는 대신 중국 대문호 루쉰의 글귀를 인용했다. '희망은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없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는 지상의 길과도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는데,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작가는 "이렇게 한 걸음 물러서서, 다 함께 보면서 스스로 길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런 작업이 됐으면 한다"라고 강조했다.

자칫 산만할 수도 있는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라쿠고다. 작가가 매일 아침 도쿄의 한 식당에서 라쿠고가(落語家) 우타지 산유테이를 만나 함께 짰다는 만담은 그 자체만으로도 맛깔나 작품에 생기를 불어 넣어준다.

이번 전시는 중견기업 KH바텍이 운영하는 비영리 전시공간 페리지갤러리가 40대 이상 작가를 소개하는 '페리지 아티스트' 18번째 행사다. 5월 11일 폐막한다.

정아란 기자
2019.3.19
(기사 원문: https://www.yna.co.kr/view/AKR20190318165200005?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