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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GEE GALLERY의 새로운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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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전경 출신 작가의 휴머니즘 ‘채증’
2015-12-30

김기라 작품. 도판 제공 페리지갤러리
김기라 작품. 도판 제공 페리지갤러리

김기라 사회비판 영상 작품전
시위현장 대립 속 인간미 포착
한판의 부조리극 같은 시위 현장이 영상에 등장한다.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를 배경으로 전투모를 쓴 전투경찰과 무언가를 요구하며 욕설과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대치하며 치고박는 모습이다. 경찰은 경고를 연발하고, 시위대는 방패와 전투모를 빼앗으려고 한다. 어린 전경대원들은 그들의 손길을 막으려 발버둥친다. 명분을 내걸고 싸우지만 다른 눈으로 보면, 상징을 빼앗으려는 싸움이다.

땀투성이가 되어 밀치고 때리고 잡아당기고 하는 대결. 후배 전경들은 선배 전경들의 날카로운 눈빛과 기합소리에 질려 감히 뒤로 물러서지 못한다. 어정쩡하게 방패막이가 되어있는 그들을 성난 시위대가 집요하게 공격한다. 결국 앳된 전경대원이 전투모를 빼앗긴 채 시위대 사이에 고립되자 정작 일부 시위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의 머리를 다독이고 보호해준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은 헤어진다. 현장은 평온해지고, 시위했던 이들은 빼앗았던 전투모와 방패를 돌려준다. 신발을 찾아주는 이도 있다.

전경 출신이라는 김기라 작가의 영상작품 ‘이념의 무게-예상된 협상’(2013·사진)은 지금 대한민국의 갈등의 현장을 다룬다. 경찰과 시위대는 서로의 적들을 향한 시선에만 골몰한다. 경찰은 채증사진을 찍고 시위대의 기록자들과 기자들은 경찰의 진압 장면에 주로 앵글을 맞춘다. 작가는 숱한 욕설과 압박 속에서도 둘 사이의 경계를 배회하며 집요하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들 사이를 잇는 휴머니즘의 고리를 포착한다. 이 영상이 예술로서 감각과 에너지, 의미를 발산하는 대목이다.

2000년대 초 데뷔 이래 패러디를 즐겨쓰며 현대소비사회를 비꼬았던 그는 최근 전시에 한반도의 분단과 대한민국의 갈등을 주목하며 좀더 진중해진 사회 비판을 담은 영상, 설치, 드로잉 작품들을 들고 나왔다.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성우들의 대사로 더빙해 극장에서 목소리만 들려주거나, 평양냉면을 먹다 생각난 북녘에 대한 메시지를 백령도의 해변에서 병에 담아 띄워보내는 프로젝트, 한끈으로 묶였는데도 서로를 벗어나려도 애쓰다 결국 같이 쓰러지는 춤꾼들의 퍼포먼스 영상 등이 함께 나온다. 진정성은 충분히 전달되지만, ‘…예상된 협상’ 외의 다른 작업 들은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품에 머무는 듯한 아쉬움도 남는다. 7월31일까지 서울 서초동 페리지 갤러리 개관전으로 열린다. 070-4676-7034.

노형석 기자